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단 편집) === [[닥터 지바고]] ===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의 본격적인 집필은 1945년부터이다. 이 때부터 스탈린이 죽는 1953년까지는 페레델키노에 처박혀 나 죽었소 상태로 집필에 매달렸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가 되거나 말거나... 그가 매달린 것은 집필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올가 이빈스카야'''(Ольга Всеволодовна Ивинская, 1912~1995)였다. 1946년, 노비 미르紙 사무실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34세의 그녀는 당시 56세였던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 뒤로 친분을 갖게 되고 차차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거의 아버지뻘인데...~~ 이빈스카야 본인은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고 두 번째 남편이 전사(戰死)하자 과부가 된 상태였다. 류드밀라라는 딸과 드미트리라는 아들이 있는 이빈스카야는 먼저 파스테르나크에게 다가갔으며, 그를 위해 페레델키노에 다차(dacha, 별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듣고 거기에 매료된 파스테르나크는 아내 지나이다와는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빈스카야와 함께 살았다. 밤에는 아내와, 낮에는 일 핑계로 이빈스카야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지나이다를 버리지 못하는 파스테르나크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진 그녀는 그의 비서의 신분으로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비서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런데 이빈스카야와 함께 한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9년 올가 이빈스카야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했다. 《닥터 지바고》의 집필 소문을 전해들은 스탈린이 파스테르나크를 족쳐야겠는데 자기 입으로 그를 체포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녀를 대신 잡은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수용소에서 5년을 썩고 스탈린이 죽자 석방되어 나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파스테르나크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감옥 안에서 유산을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는 동안 파스테르나크는 그녀의 어머니와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 무렵 파스테르나크가 그녀에게 쓴 편지는 꽤나 아련하다. >가만히 응시해도 눈 오는 밤 >모든 것이 아물거려 나는 경계를 그을 수 없네. >나와 그대가 어디서 나뉘는지... 스탈린 사망 이후 해빙기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은 소련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집필하는 동안 폐암과 심장병이 악화되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여러 번의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고비를 넘겨왔었다. 《닥터 지바고》의 출판이 소련에서 불발되자, 파스테르나크는 마침 친분을 맺은 아이제이아 벌린 경(Sir Isaiah Berlin, 1909~1997)[* 냉전시대에 문화적 반공주의에 깊이 몸담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의 도움으로 원고를 영국으로 빼돌리고, 이빈스카야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의 잔지아코모 펠트리넬리(Giangiacomo Feltrinelli, 1926~1972)를 통해 출판에 성공했다. 펠트리넬리는 공산당원이었는데 이 일로 인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서방 세계에 알려진 소설은 러시아의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다는 업적을 인정받아 출판 1년만에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이 때 그의 수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시대 서정시 및 위대한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에 관한 중요한 공적에 대하여 이 상을 수여합니다(for his important achievement both in contemporary lyrical poetry and in the field of the great Russian epic tradition)."|| 파스테르나크는 아내 지나이다와 함께 트빌리시의 니나 타비제의 집에 놀러가 쉬고 있던 중 이 전보를 받고 기뻐서 이틀 뒤 이렇게 수상 소감을 전했다. >너무나 고맙고, 감동적이고, 자랑스럽고, 놀랐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이틀 뒤, 그는 입장을 바꿔 이런 서한을 보냈다. >제가 속한 사회의 수여하는 이 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수상을 사양할 수밖에 없으니 제 결정에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거부 이유는 소련 정부의 압박과 동료 작가들의 비난 때문이라고도 하고, 수상 선정 이유가 체제 경쟁자 소련을 비방하기 위한 서방세계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는 동료들의 설득을 인정했다는 설이 엇갈린다. 선정 이유가 정치적 목적이라는 것은 [[http://apps.washingtonpost.com/g/page/world/the-cia-and-doctor-zhivago-dispatch-from-jan-2-1958/921/|워싱턴 포스트에서 공개한 문서에 따라]] [[http://litreactor.com/news/newly-declassified-documents-reveal-the-cia-used-doctor-zhivago-to-fight-communism|진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개입해있었다. 하지만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의 거부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취소하지 않았다. 이에 소련작가동맹이 그를 [[제명]]했고, 급기야 국외로 아예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에게 이렇게 청원했다.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 스탈린보다는 [[나는 관대하다|관대한]] 흐루쇼프가 이를 받아들여, 그는 겨우 망명만은 면한 채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폐암과 심장병을 안고 페레델키노에 숨어있다시피 하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 이는 파스테르나크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소련은 국제적인 비난에 노출되었다. 스탈린 시대라면 이념적 동조자들의 실드질+폐쇄사회, 외국에서라면 뭐라고 하든지 아랑곳하지 않는 볼셰비키적 똥배짱으로 씹어버렸겠지만 스탈린은 죽었고 더 이상 스탈린식 사회는 유지될 수 없었으며 헝가리 혁명 이후 서방의 소련 지지자들은 격감했고, 소련 지도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멘탈을 가지지 못했다. 이 덕분에 파스테르나크와 대조적으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솔제니친]]은 소련 당국의 심기 따위는 상관없이 직접 수상했음에도 파스테르나크 사건으로 엄청나게 데인 소련 지도부는 솔제니친의 처분을 놓고 몇년을 논의해야 했으며 브레즈네프는 그를 소련에서 추방하는 것조차도 꺼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